기능은 다 적혀 있는데,
결정이 안 되는 이유
강동욱 — 밑그림 대표 · 기획 우선 웹 스튜디오
기능 목록을 지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양은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의 확인 재료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정하지 못한 사람 앞에 사양부터 놓으면, 그 사람은 "그래서 나한테 뭐가 달라지는가"를 스스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 번역은 대개 우리에게 이미 관심이 있는 사람만 해 줍니다.
왜 사양부터 쓰게 되는가
이제 시작하는 브랜드나 값이 큰 서비스일수록 페이지가 사양 목록으로 채워집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후기도 사례도 아직 없으니, 우리가 갖춘 것으로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정·재료·자격·범위·옵션이 빠짐없이 적힙니다. 성실한 페이지이고, 실제로 틀린 정보도 하나 없습니다.
문제는 정확성이 아니라 누가 계산을 하느냐입니다. 사양 목록은 전부 "우리가 무엇을 한다"는 문장입니다. 방문자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러면 내 상황이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한 칸의 번역이 필요하고, 사이트가 그 칸을 비워 두면 방문자가 대신 채워야 합니다. 이미 우리를 알아보고 들어온 사람은 채워 줍니다. 오늘 처음 검색해서 들어온 사람은 채우지 않고 나갑니다.
값이 큰 일에서는 손해가 한 번 더 겹칩니다. 금액이 커질수록 방문자는 혼자 결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에게, 대표에게, 팀에게 한 번은 설명해야 합니다. 그때 옮겨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양표가 아니라 한 줄로 요약된 결과 문장입니다. 옮겨 말할 문장을 주지 않으면, 마음에 들었던 페이지도 회의실에서 재현되지 않습니다.
첫 화면부터 사양이 나오는 사이트는 대개 회사 소개를 먼저 쓰는 사이트와 같은 자리에서 어긋나 있습니다. 방문자의 순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순서로 적혀 있는 겁니다.
아직 정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번역해야 할 숙제고요.
결과로 옮기는 네 가지
- 항목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집니까"를 딱 한 번만 붙입니다. 한 번이 중요합니다. 한 칸 옮기면 번역이고, 두 칸 세 칸 건너뛰면 과장이 됩니다. "모든 화면 크기에 대응합니다"를 한 칸 옮기면 "휴대폰으로 본 사람도 컴퓨터로 본 사람과 같은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가 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래서 문의가 늘어납니다"까지 가면, 사이트 밖 변수가 너무 많아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문장이 됩니다. 방문자도 그 점프를 압니다.
- 결과를 성과가 아니라 상태로 씁니다. 성과는 지나 봐야 알 수 있지만, 상태는 지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적이 아직 없는 브랜드에 특히 중요한 구분입니다. 성과를 약속하려면 없는 숫자를 만들어야 하지만, 상태는 우리가 만든 것 안에서 참이면 그대로 적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더는 필요 없어지는가", "무엇을 더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가", "무엇이 미리 정해진 채로 시작되는가" — 이 셋은 첫날에도 쓸 수 있는 결과 문장입니다.
- 사양은 지우지 말고 근거 자리로 내립니다. 사양을 없애면 검토하는 사람이 확인할 것이 사라집니다. 순서만 바꾸면 됩니다. 결과 문장이 앞에 서고, 사양은 그 결과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받쳐 주는 근거로 뒤에 붙습니다. 이렇게 두면 같은 목록이 성실함의 증거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자리에 따라 같은 정보의 역할이 달라지는 이야기는 메인에 다 넣으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에서 더 다뤘습니다.
- 결과 문장에 조건과 예외를 붙입니다. 조건 없는 결과 문장은 광고문구로 읽히고, 광고문구는 값이 클수록 더 의심받습니다. 어떤 경우에 이 결과가 나오고 어떤 경우에는 안 나오는지, 무엇이 준비돼 있어야 하는지를 같이 적으면 문장의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안 맞는 경우를 먼저 밝히는 것이 왜 손해가 아닌지는 상담마다 같은 설명을 반복하고 있다면에 정리해 뒀습니다.
네 가지를 다 하고 나면 판별법 하나가 남습니다. 그 결과 문장이 거짓이 되는 경우를 말할 수 있는가. "고객 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같은 문장은 거짓이 되는 경우를 떠올릴 수 없습니다. 반증할 수 없는 문장은 읽는 사람에게 아무 정보도 주지 않습니다. 반대로 조건과 예외가 있는 문장은 반증이 가능하고, 그래서 믿을 만해집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세요
대표님 사이트의 서비스 소개 페이지를 열고 다섯 줄을 짚어 보세요.
- 화면 위쪽에 먼저 나오는 것이 사양 목록인가, 결과 한 줄인가?
- 사양 항목마다 "그래서 방문자에게 남는 것"이 한 줄씩 붙어 있는가?
- 결과 문장 중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칸까지 건너뛴 것이 있는가?
- 그 결과 문장이 거짓이 되는 경우를 말할 수 있는가?
- 이 결과가 안 나오는 경우·필요한 조건이 어딘가에 적혀 있는가?
네 번째 줄에서 막혔다면, 그 문장은 지금 우리 서비스가 아니라 업종 전체에 대한 덕담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기능·사양 목록을 아예 빼야 하나요?+
사양은 방문자가 "여기가 내 경우를 다루는 곳"이라고 판단한 다음, 그 판단이 맞는지 확인하는 근거로 쓰입니다.
판단 전에 놓인 사양 목록은 방문자에게 알아서 번역해 보라는 요구가 되고, 그 번역은 이미 관심 있는 사람만 해 줍니다.
실적이 없는데 결과를 쓰면 과장이 되지 않나요?+
"매출이 오릅니다"는 사이트 밖 변수가 너무 많아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문장입니다.
반면 "무엇을 더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처럼 우리가 만든 것 안에서 참인 문장은 첫날에도 쓸 수 있고 확인도 됩니다.
B2B나 전문서비스는 사양을 꼼꼼히 보는 사람이 오지 않나요?+
결정하는 사람은 이게 자기 문제를 푸는지를 먼저 보고, 검토하는 사람은 조건과 사양을 봅니다.
둘을 한 화면에 섞지 말고 순서로 나누면 됩니다 — 결과가 앞, 사양은 그 결과의 근거로 뒤입니다.
밑그림은 페이지에 무엇을 적을지 정하기 전에, 그 페이지를 읽은 사람에게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부터 정합니다.
지금 사이트가 방문자에게 번역을 시키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아래 셀프 체크리스트로 짚어 보세요 — 3분이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