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을 안 적으면,
아낀 게 아니라 미룬 겁니다

가격을 안 적는다고 협상력이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결정이 미뤄질 뿐이고, 그 비용은 대표님의 상담 시간으로 청구됩니다. 게다가 방문자는 가격 자리에 숫자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여기 있어도 되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러 옵니다.

"문의 주세요"만 남은 화면에서 벌어지는 일

가격을 안 쓰는 이유는 대체로 합리적입니다. 케이스마다 범위가 다르고, 숫자만 보고 비싸다고 판단할까 봐 걱정되고,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설득할 자신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문의 주세요" 한 줄을 두고 나머지를 상담으로 넘깁니다.

문제는 그 한 줄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한 종류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예산이 한참 아래인 사람, 예산이 맞는 사람, 예산이 넉넉한 사람이 같은 화면을 봅니다. 그리고 세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예산이 아래인 사람은 밑져야 본전이라 대체로 물어봅니다. 예산이 맞는 사람은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값이 큰 결정일수록 후보를 여러 곳 놓고 비교하는데, 물어보는 순간 관계가 시작되고 나중에 거절할 부담까지 생깁니다. 아직 확신이 없는 단계에서 그 부담을 지느니 조용히 후보에서 빼는 쪽이 편합니다. 결과적으로 걸러 내고 싶었던 문의는 남고, 잡고 싶었던 사람이 말없이 빠져나갑니다.

문의 건수가 줄지 않았다면 더 헷갈립니다. 숫자는 그대로인데 상담은 계속 늘고, 통화 끝에 "예산이 그 정도인 줄 몰랐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사이트가 해야 할 첫 번째 안내를 대표님이 매번 육성으로 대신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구조는 상담마다 같은 설명을 반복하고 있다면에서 다룬 것과 같은 문제이고, 가격은 그중 가장 비싼 반복입니다.

한 가지를 더 짚고 갑니다. 가격을 못 적는 진짜 이유가 숫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범위가 안 정해져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까지 하고 무엇은 하지 않는지가 스스로도 확정되지 않았으니 금액이 매번 달라지고, 그러니 적을 수가 없습니다. 이건 가격 표기의 문제가 아니라 상품이 아직 안 만들어진 상태이고, 화면을 고쳐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격 자리의 첫 번째 일은 파는 게 아닙니다.
맞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 돌아서게 하는 겁니다.

숫자를 다 못 쓰더라도 할 수 있는 네 가지

  1. 가격표 말고 시작점 하나를 적습니다. 모든 항목의 금액을 공개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방문자가 알아야 하는 건 대개 하나입니다 — 이 일이 대략 어느 자리에 있는가. 그래서 "최소 이 구성이면 이 금액에서 시작합니다" 한 줄과, 그 금액에 무엇이 포함되고 무엇이 빠지는지면 충분합니다. 조건은 하나입니다. 그 금액으로 실제 진행 가능한 구성이 있어야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최소 구성을 미끼로 적으면 상담 첫 5분에 들통나고, 그때부터는 나머지 문장도 전부 의심받습니다.
  2. 값을 움직이는 변수를 엽니다. 케이스마다 다르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다르게 만드는 요인은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페이지 수, 촬영 여부, 콘텐츠를 누가 준비하는지, 일정을 당기는지. 서너 개면 됩니다. 무엇이 붙으면 올라가고 무엇이 빠지면 내려가는지를 적어 두면 방문자는 자기가 어느 구간에 있는지 스스로 계산합니다. 계산이 되면 문의는 "얼마예요?"가 아니라 "저희는 이 조건인데 맞나요?"로 바뀝니다. 상담이 처음부터가 아니라 중간부터 시작됩니다.
  3. 맞지 않는 경우를 먼저 씁니다. 가격을 숨기는 동기는 "놓칠까 봐"인데, 실제로 놓치는 쪽은 반대라는 것이 앞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 한 발 더 갑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가 맞지 않는지를 그 자리에 적습니다. 예산이 어느 선 아래면 다른 방법을 권한다, 이런 종류의 일은 받지 않는다. 거절하는 문장이 사이트에 남아 있으면 남은 사람 쪽의 신뢰가 올라갑니다. 아무나 받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 되니까요. 이 신호의 어긋남이 값이 큰 일에서 어떻게 가격 저항으로 돌아오는지는 돈은 들였는데 싸 보이는 사이트, 어디서 갈릴까요에 정리해 뒀습니다.
  4. 숫자를 정말 못 쓰는 일이라면, 순서와 기준을 대신 씁니다. 견적이 현장 실측 뒤에야 나오는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 비워 둘 게 아니라, 견적이 정해지는 절차를 적습니다. 무엇을 보고 정하는지, 몇 단계를 거치는지, 언제 확정되는지, 그 전에 비용이 발생하는지. 방문자가 불안한 건 금액의 크기가 아니라 금액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절차가 적혀 있으면 숫자가 없어도 예측 가능한 상대가 됩니다. 나중에 청구되는 비용을 미리 말해 두는 것도 같은 자리의 일입니다 — 템플릿으로 시작할 때, 나중에 청구되는 비용에서 다룬 관점입니다.

네 가지를 마치면 기준 하나가 남습니다. 가격 자리의 성패는 문의가 늘었는지가 아니라, 상담 한 건이 진행으로 넘어가는 비율로 봅니다. 가격을 적으면 문의 건수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줄어든 것이 애초에 진행되지 않았을 문의라면 그건 손실이 아니라 회수한 시간입니다. 반대로 예산이 맞는 사람까지 줄었다면, 빠진 건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를 설명하는 맥락입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세요

사이트에서 가격이 언급되는 자리를 열고 다섯 줄을 짚어 보세요.

  • 방문자가 사이트만 보고 "내 예산 안인지 밖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가?
  • 금액을 움직이는 요인이 서너 개라도 적혀 있는가?
  • 우리가 맞지 않는 경우가 한 줄이라도 쓰여 있는가?
  • 숫자가 없다면, 견적이 정해지는 순서와 시점이 대신 적혀 있는가?
  • 최근 상담에서 "예산이 그 정도인 줄 몰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마지막 줄에 해당한다면, 그 대화는 사이트에서 이미 끝났어야 할 대화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가격을 공개하면 경쟁사가 그대로 따라오지 않나요?+
경쟁사는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의 한 건이면 견적서가 넘어가고, 그 경로는 사이트에 적든 안 적든 열려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적어서 실제로 못 보게 되는 쪽은 경쟁사가 아니라 대표님을 처음 발견한 방문자입니다.
값이 큰 일에서 따라 하기 어려운 건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를 정당화하는 범위·순서·기준입니다. 같은 금액을 써 붙인 곳과 왜 그 금액인지 설명해 둔 곳은 방문자에게 같은 화면이 아닙니다.
케이스마다 견적이 완전히 다른데, 시작 가격을 적으면 그 숫자에 묶이지 않나요?+
시작 가격은 약속이 아니라 자리 표시입니다. 묶이는 문제는 대개 두 경우에서 생깁니다 — 실제로 없는 최소 구성을 미끼로 적었거나, 무엇이 포함되고 빠지는지를 같이 안 적었거나.
실제 진행 가능한 구성을 적고 값을 올리는 조건 서너 개를 함께 두면, 방문자가 자기 구간을 스스로 계산합니다.
도저히 숫자를 못 쓰는 일이라면 금액 대신 견적이 정해지는 순서와 기준을 적습니다. 불안한 건 금액의 크기보다 정해지는 방식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가격을 적었더니 문의가 줄었습니다. 잘못한 건가요?+
줄어든 것이 어떤 문의인지부터 봐야 합니다. 예산이 한참 아래인 문의가 사라지고 진행 비율이 올라갔다면 가격 자리가 제 일을 한 겁니다.
예산이 맞는 사람까지 줄었다면 빠진 건 숫자가 아니라 맥락입니다. 금액만 덩그러니 있고 무엇이 포함되는지가 없으면 비교할 재료 없이 숫자만 보고 판단하게 됩니다.
봐야 할 지표는 문의 건수가 아니라 상담에서 진행으로 넘어가는 비율입니다. 어느 구간이 막혔는지 찾는 순서는 문의가 안 늘 때, 어디가 막혔는지 찾는 순서에 있습니다.

밑그림은 가격을 적을지 말지를 취향으로 정하지 않고, 무엇까지 하고 무엇은 하지 않는지부터 확정한 다음 그 자리에 쓸 문장을 만듭니다.
지금 사이트에서 방문자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자리가 어디인지 궁금하다면 아래 셀프 체크리스트로 짚어 보세요 — 3분이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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